정리하자—너희는 ‘더 깨끗하고 더 맛있고 더 안전하고 더 건강한’ 물을 돈 주고 사는 거다.
이름은 뭐라 붙이든 상관없어.
난 씨발 그런 건 신경도 안 써.
난 그냥 게으른 새끼고 어찌어찌 굴러가면서 너희한테 현실을 말해주는 놈이야.
그리고 현실 하나—너희 올 푸즈 구독으로 존나 털리고 있다는 거지.
왜? 나보다 더 게으르니까. 아니면 그냥 뇌에 스콥이 찼거나.
자, 딱 정리해줄게.
나이트 시티엔 깨끗한 물 기준이 있지? 뭔지는 나도 몰라. 근데 ‘있긴’ 있어.
문제는 정수장에서 한 번 처리되고 나서야.
그 다음에 물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좆도 신경 안 써. FR34K_S33K 빼고는.
웃기지? 나이트 시티에는 진짜로 ‘깨끗한 식수 관리국’이 있다.
직원 수? 둘. 일을 잘하냐? 모르겠다.
왜냐면 걔네는 수년 동안 출근을 안 했거든.
세금이 참 열심히도 일한다, 씨발.
그럼 누가 나이트 시티 수질을 ‘감독’하냐고? 맞혀봐.
전문가 팀? 전문가 둘? 한 명? 어떤 빌어먹을 인턴? 아니야.
아무도 그딴 거 검사 안 해. 사실 너도 검사할 생각 없잖아. 있는 척하지 마.
그래서 대신, 너희는 ‘리얼 워터’ 구독을 끊고 깨끗한 물 배달을 받지.
똑똑하네. 기업들이 말이지. 너희가 아니라.
재밌는 건 말이야—물 처리하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아.
근데 더 안 어려운 건 뭔지 알아?
깨끗해진 물에 다시 온갖 더러운 걸 처넣는 거.
기억해라, 병신들아. 너희가 돈 내는 건 ‘더 깨끗한 물’이 아니다.
‘독 안 먹고 살기’에 돈 내는 거야.
아, 미안. 이거 듣고 기분 잡쳤냐?
그래,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싫으면 브레인댄스나 틀어놓고 딸치든가 해.
그럼에도 계속 볼 놈들은—뭐 하냐? DOWNLOAD 버튼 박살 내고 다음 FR34K_S33K 핫테이크나 기다려.
PEACE!
—
"또 나랑 엮이게 됐네."
그녀가 크고, 존나 비싸 보이는 여행가방을 방 한가운데로 굴려 넣었다.
"그래서, 네가 알버트야? 전혀 이렇게 생겼을 줄은 몰랐네."
밀레나는 잠깐 그를 가만히 훑어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십대 소년은 즉석 신스 라멘 그릇 너머로 그녀를 힐끗 보고는 되묻듯 말했다.
"갑자기 마음 바꾼 이유가 뭔데?"
"목 뒤에 C-링크가 있네."
밀레나가 자기 목덜미를 가리켰다.
그녀는 우아한 오버코트를 벗어 소파에 툭 던졌다.
안쪽엔 단정하고 슬림핏으로 떨어지는 기업 정장이 드러났다.
"이거면 누가 우릴 노리는지 찾는 데 도움이 될 거야."
"C-링크 하나로는 부족해."
알버트가 어딘가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개조한 리스랑 티어2 부품 몇 개로 어떻게든 티어1에 붙어는 있는데 사이버덱은 여기서 더 못 올려. 난 제대로 된 티어2가 필요해."
막 잠에서 깬 아야가 방으로 들어왔다.
"어?"
아야가 밀레나를 보고 멈칫했다.
"마음이 바뀐 거야?"
"선택지가 없었어. 어제 누가 날 납치하려고 했거든."
"너만 그런 거 아니야."
아야가 바로 받아쳤다.
"너희 둘 중에 조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 있어? 메시지를 보내도 답이 없어."
"론은?"
밀레나가 주변을 둘러봤다.
"누가 우리 전부를 정리하려고 움직이고 있어. 누군지는… 짐작은 가. 근데 아직 확신은 없어."
그녀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어쨌든, 우린 이미 길을 깔아버렸어. 그러니까 계속 걸을 거야. 대신 이제부터는— 계획도 제대로 세워야해."
밀레나는 가방을 옆으로 눕히고 지퍼를 열었다.
우아한 여자 가방에서 기대할 법한 옷, 화장품 같은 건 없었다.
알버트의 눈이 확 커졌다.
그는 거의 경건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가방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더니 두꺼운 절연재로 감싼 굵직한 케이블을 꺼냈다.
"이게 뭐야?"
아야가 케이블과 스펀지 같은 완충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회사에서 빌렸어."
밀레나가 대답했다.
"돌려줄 일은 없을 것 같고."
"티어3 넷러닝 장비네."
알버트가 평소랑 완전히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전용 쿨웨어까지 달린."
인간은 백업이 안 된다.
죽으면 끝.
그대로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물론 누군가의 DNA를 보존해두고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똑같은 몸을 새로 만들어낼 수는 있다.
비싸지만 가능은 하지.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일까? 되살아나는 건 몸뿐이다.
정신은 아니다.
똑같은 하드디스크를 하나 더 찍어내도 안에 데이터가 텅 비어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의 ‘정신’을 백업하는 방법을 아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블랙월 뒤쪽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인간이 아니겠지.
해머로프와 펜로즈의 ‘양자 의식’ 이론이 맞다면 인간의 정신은 생물학적 양자 컴퓨터다.
의식, 기억, 지식—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전부는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확률의 구름이고 그 양자 상태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3차원 아니 4차원 바깥 어딘가에 놓여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리고 알버트가 그걸 사실이라고 믿는다면 그 데이터를 압축해서 옮긴다는 건 지금 기술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업들의 슈퍼컴퓨터가 아무리 세도 인간 뇌 안에서 벌어지는 과정의 복잡함을 따라갈 수는 없다.
의식을 옮기고 흉내 내려는 시도는 적어도 반세기 전부터 이어져 왔다.
알버트는 소울킬러에 대한 정보를 담은 모든 자료를 샅샅이 뒤졌다.
아라사카의 ‘렐릭’ 기술이 기반으로 삼은 그 프로그램.
하지만 알버트가 보기에 그건 마술 트릭에 가까웠다.
상호작용 홀로그램보다 나을 것도 없는—사후에 사람인 척하는 무언가.
게다가 완벽과는 거리가 먼 에뮬레이션조차도 연산 자원을 미친 듯이 집어삼킬 테니 그 정도 낭비를 승인할 조직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블랙월 ‘이쪽’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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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S-03, 로그 55349.
동기화 절차 개시.
미확인 장치 NI100101001110. 상태: 불명.
하위 시스템 감지: 117개.
동기화 절차 진행 중.
"며칠은 쉬어야 돼. 나나이트가 일하게 놔둬."
"더 필요해."
"말도 안 돼. 남는 조직이 전이성으로 증식할 위험이 커져."
론이 딱 잘랐다
"날 믿어. 이마에서 갑자기 좆이랑 불알이 자라나는 꼴 너도 보고 싶진 않잖아."
재활용 압축 플라스틱으로 된 보호 패널이 내벽을 감싼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갔다.
"그래도 재생은 생각보다 매끈하게 붙고 있어."
리퍼닥이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 임플란트가 말썽 안 부린다고 끝난 게 아니야. 에너지를 아끼라고. 조직이 아직 완전히 안정화가 안 됐어."
"내 몸이 스콥으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이야."
조르가 말했다.
론의 머릿속에서 찜찜한 생각 하나가 떠나질 않았다.
"네 임플란트 말이야…"
론이 슬쩍 찔러봤다.
"거의 순식간에 셋업이 끝났어. 내가 손댄 게 하나도 없었는데."
"몸이 기억하니까."
"몸이 아니라."
리퍼닥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감속하며 멈추는 바람에 그는 그 말을 더 잇지 않았다.
둘은 덜 마감된 콘크리트 복도로 걸어 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뒤에서 닫히자 복도는 거의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론이 오른쪽 두 번째 문 앞으로 가서 생체 인식 잠금장치에 손을 올렸다.
문이 미끄러지듯 열리며 빛 한 줄기가 복도에 길게 흘렀다.
"우리 생체정보도 다 따놨네."
론은 인사 대신 그렇게 말했다.
"여긴 뭐야?"
"안전한 곳."
워든이 대답했다.
"그래, 너한텐 안전하겠지…"
론이 중얼거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진 창문은 두꺼운 먼지층에 덮여 있었다.
이웃 건물 윤곽이 흐릿하게만 비쳤다.
몇몇 창은 아직도 보호 비닐이 걸려 있었다.
30층.
콘크리트 기둥 옆엔 전자 장비를 옮길 때 쓰는 옆면에 소켓이 박힌 군용 케이스들이 쌓여 있었다.
더 안쪽엔 텅 빈 욕조 하나가 있었고 그 안에서 두꺼운 케이블 다발이 땋인 머리처럼 이어져 미완성 유닛 깊숙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닥에 남아 있는 물은 먼지에 섞여 탁했다.
론은 경계하며 주위를 훑었다.
워든은 접이식 테이블에 기대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늘 입던 신스 가죽 코트를 걸치고.
"픽서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가 말했다.
"필요했지. 근데 저번엔 우리보고 아마추어라며."
조르가 다가갔다.
발밑에서 콘크리트 부스러기가 바삭하고 으스러졌다.
"그랬어…?"
론이 조르를 보며 물었다.
"맞으니까."
워든이 말했다.
"내가 아로요 일에 너희를 쓴 이유도 그거 하나였지. 겉보기엔 그냥 평범한 놈들, NCPD DB엔 기록도 없고."
그는 어깨를 펴며 자세를 바로 했다.
"변한 건 없어. 그러니까 또 써먹을 수 있지."
"일 하나 줄게. 보수는 50만. 나눠 먹는 건 알아서 해."
"50만? 선금으로 현찰?"
론이 물었다.
"또 그런 좆같이 병신 같은 질문 한 번만 더 해봐."
워든이 신경질적으로 말을 뱉었다.
"눈앞에 납탄을 선금으로 처박아줄 테니까."
"일이 뭐냐?"
조르가 물었다.
"어딘가에 침입해서 내 대신 뭐 하나 훔쳐 오면 돼."
워든이 말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갈 때를 대비해서 총도 좀 챙겨. 필요한 건 내가 다 줄테니."
"우리 장비는 알아서 챙겨갈 거야."
조르가 단호하게 말했다.
워든은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더니 반으로 뚝 갈라 세어보지도 않고 조르에게 건넸다.
"오늘 안으로 필요한 거 다 갖춰. 미등록, 시리얼 없는 걸로. 시간 싸움이야."
"무기상은 우리가 찾을게."
론이 장담했다.
"그래? 좋겠다."
워든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차 딜러 옆마다 무기상이 하나씩 붙어 있겠네."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체념한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마추어 타임이로구만…"
"우리끼리 할 수 있어."
조르가 말했다.
"너희가 뭘 할 수 있겠냐."
워든이 말했다.
그는 눈을 한 번 깜박였고 홍채가 선명한 파란빛으로 번쩍였다.
"여기."
조르의 폰이 새 메시지로 울렸다.
그는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씨발, 장난하냐…"
워든이 조르가 폰을 사용하는 것 보고 어이없어하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는 말이라도 타고 가게? 그것도 같이?"
조르는 잠깐 망설이다가 습관이 몸을 움직이게 놔뒀다.
폰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고 눈을 한 번 더 깜박였다.
홍채가 파랗게 유리막처럼 흐려졌다.
망막 디스플레이 위로 떠오른 연락처 정보를 빠르게 훑었다.
"거기 딜러, 좋은 놈은 아니야."
워든이 말했다.
"냄새는 씨발 동물원인데 그래도 물건은 깨끗해. 추적도 안 되고."
"근거리, 좁은 데서 쓸 총으로 골라."
"계획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서…"
조르는 돈뭉치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대부분은 틀어지니까. 근데, 우린 누구를 터는 거지?"
"나."
워든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 컨테이너 훔쳐 와. 저번이랑 같은 거."
—
"너…"
론이 밀레나를 보고 얼어붙었다.
그는 아직 문턱을 제대로 넘지도 못했다.
"안전하지가 않아서 돌아왔어."
밀레나는 소파에 반쯤 기대 누워 잠이라도 들 것처럼 말했다.
"집엔 다시 가고 싶지 않고."
론이 여행가방을 힐끗 보고 웃었다.
"진짜로 이사 올 생각이네."
"아, 저거? 아니."
밀레나가 자기 뒤쪽을 가리켰다.
알버트는 의자에 누워 있었다.
네오프렌 잠수복 같은 걸 입은 채 몸 여기저기엔 소켓이 박혀 있고 복잡하게 보이는 튜브와 케이블이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케이블 하나는 창문을 조금 열어둔 발코니 쪽 열교환기로 이어졌고 다른 케이블들은 밀레나 옆에 놓인 작은 금속 서류가방 형태의 터미널로 연결돼 있었다.
화면에는 생체 신호들이 떠 있었다.
론 뒤로 조르가 들어왔다.
아야의 미소는 순식간에 걱정으로 바뀌었다.
"조르… 괜찮아?"
아야가 물었다.
"너, 얼굴이…"
조르의 눈꺼풀은 붉게 충혈돼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다.
"내가 지금 느끼는 대로 생겼겠지."
조르가 말했다.
"마취 때문이야. 론이 조금 ‘미세조정’했거든. 괜찮아."
아야는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눌렀다.
부러질까 봐 겁내는 손길처럼.
"내일이면 재생은 다 끝나."
조르가 말했다.
론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고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연락 왔어?"
아야가 마침내 물었다.
"아니."
조르가 말했다.
"대신 일이 생겼어. 론의 새 사이버암 값은 충분히 나오고도 남아. 그럼 널 고칠 수 있을 거야."
아야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줄리에나는 알버트가 찾아낼 거야."
아야가 말했다.
그 사이 론은 밀레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밀레나, 안전하지 않았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론이 물었다.
"뭐… 알잖아."
밀레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누가 날 미행했고, 납치하려고 했지. 그 정도."
---
62초. 자기 ICE를 뚫고 ‘케이브’에 접속하는 데 걸린 정확한 시간이었다.
감정이 뒤섞였다.
그게 그의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일지도 몰랐다.
새 장비를 부팅하자마자 첫 시도에서—아슬아슬하게 성공했다.
아로요 건으로 워든에게 ‘보상’처럼 받은 새 프로그램 묶음은 그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그는 기뻐해야 했다.
그런데 가슴에 내려앉은 건 기쁨이 아니라 지난 몇 년 동안 자기가 사실상 맨몸이나 다름없었다는 깨달음이었다.
본인도 모른 채로.
그래서 그는 제일 먼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빡센 암호화를 걸어 두기로 했다.
그다음으로 그를 충격을 준 건 지금까지 자기가 만들어 온 것들의 ‘퀄리티’였다.
처참했다.
예전엔 사이버덱의 잠재력을 끝까지 끌어올린 결과물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이제는 스크립트키디가 만든 것처럼 보였다.
데이터베이스 관리 매크로 짜는 데 몇 주를 쏟아부었던 일을—티어3에선 15분이면 끝낼 수 있었다.
그것도 더 잘.
그가 오래도록 드나들며 익숙해진 자기만의 사이버스페이스는 겉보기엔 똑같았다.
그런데 느낌은 달랐다.
낡은 잡동사니 상자 맨 밑에서 우연히 찾아낸 잊고 살던 어린 시절 장난감 같았다.
그는 그 투박한 모서리들을 RAM과 연산력을 아끼기 위한 ‘불가피한 타협’이라고 여겼다.
지금 보니 그냥 싸구려였다.
조악하고 덜컹거렸다—넷러너 버전의 ‘절대 빈곤’.
특히 타란은 촌스러울 정도로 단순했다.
알버트가 에디를 벌려고 만드는 게임들과 복잡도가 다를 게 없었다.
망치로 핵벙커를 두드려 깨지 못하듯 저걸로 블랙월을 뚫을 수는 없다.
저게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넷워치와 NETSEC의 시선을 끌어오는 것.
아주 잠깐, 50밀리초 정도.
알버트는 전부 지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까 생각까지 했다.
아니. 공간은 충분했다.
살릴 수 있는 건 살릴 수 있다.
해상도는 몇 배나 더 선명했고 속도는 비교도 안 되게 빨랐다.
그는 자기 손으로 만든 알고리즘 ‘기둥’들을 대폭 줄이고 중심에서 더 멀리 밀어냈다.
위아래로 스크롤할 필요도 없었다.
한눈에 전부 보였다.
예전에 멀리 치워 둔 것들까지도 동시에 보였다.
그는 그것들을 카테고리별로 묶고 가상 아바타가 잠시 머물 수 있는 새로운 중앙 허브를 만들었다.
몇 초도 안 돼 깨달았다.
여기서도 ‘아껴 쓰는’ 감각은 필요 없다.
아바타를 여러 개 동시에 굴릴 수 있었다.
이전보다 몇천 배는 많은 데이터를 처리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강아지처럼 들떠서 그는 사이버스페이스를 미친 속도와 정밀도로 휘젓고 다녔다.
워든이 빌려줬던 장비로도 상상 못 하던 수준이었다.
더 커진 느낌. 더 빠르고, 더 좋아졌다.
게다가 이 기술은 ‘직감 기반’이라 학습 곡선도 낮았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단 하나였다.
티어3의 한계가 어디까지냐는 것.
그는 타란의 코드 전체를—처음부터 끝까지—참고 덤프, 미완성 버전까지 몽땅 한눈에 펼쳐 놓고 봤다.
그리고 보이는 건 실수와 멍청함뿐이었다.
예전 사이버덱은 통신 채널 두 개만 켜도 숨이 막혔다.
드론캠, CCTV, 감시센터 데이터 피드 사이를 왔다 갔다 할 때처럼.
그는 채널을 백 개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과부하도 없고 렉도 없었다.
필요 이상이었다.
다만 공급이 늘면 욕심도 늘기 마련이라 나중에 시스템이 어디까지 버티는지 한 번은 시험해봐야 할 것이다.
티어3가 티어1보다 이 정도로 강하면… 더 높은 티어는 대체 어떤 꼴일까.
그와 별개로 케이브에 접근 못 한 지난 며칠 동안에도 2,053유로달러를 벌어 놓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정도면 몇 달 치 월세와 식품 구독은 선결제해도 남는다.
"찾았어?"
아야의 목소리엔 기대가 묻어 있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알버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팅할 게 좀 남았어. 다시 구성해야 할 것들이 있어서."
아야는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당장 멱살을 잡고 흔들어 깨우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눌렀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줄리에나를 데려간 놈이 누군지 찾아줘."
아야가 간절하게 말했다.
"중요해."
"알아."
알버트는 냉장고로 가서 고당도 식사 박스를 꺼냈다.
"일단 좀 먹고, 그다음에 계속 찾자."
"우리가 이 꼴 난 이유가 준비를 안 해서야. 정보도 없고, 아무것도."
알버트는 담담했다.
"이번엔 다르게 해야 돼."
"씨발, 그딴 거 몰라!"
아야가 폭발하듯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난 그냥 줄리에나만 찾고 싶어. 그리고… 그리고 이 모든 게 좀 끝났으면 좋겠어…"
"우릴 노리는 놈이 누군지 찾기 전까진 절대 안 끝나."
알버트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지킬 만큼 돈을 만들기 전까진 더더욱."
"워든이 50만을 제안했어."
조르가 말했다.
론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조르에게 꽂혔다.
"그 돈이면 노스 오크에서 잔디 한 평은 사겠다."
하지만 밀레나가 현실을 끌어내렸다.
"네가 생각하는 만큼 큰돈 아니야."
"나이트 시티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잖아."
아야가 말했다.
"당연히 아니지."
밀레나가 대답했다.
"그런데 다른 데는 그냥 더 좆같을 뿐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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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장비의 잠재력을 분 단위로 더 깊이 붙잡을수록 점점 더 분명해졌다.
자기가 여기까지 온 건 그냥 기적이었다는 걸.
아니. 기적이 아니라, 그가 ‘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눈에 띄려 하지 않았고 관심을 끌 짓도 안 했다.
규모도 조그마했다—갱이나 NCPD가 흥미를 느낄 만큼은.
그는 늘 안전하게만 굴었다.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러다 워든이 나타나 그를 억지로 ‘급조된 갱’의 일원으로 끌어들였다.
그 뒤로는 그 어떤 것도 예전 같지 않았다.
인간의 몸이 스스로 고칠 수 있는 건 잔부상까지다.
큰 부상은 몸만 부수는 게 아니다.
그 안에 살던 사람의 일부까지도 같이 부순다.
되돌릴 수 없게.
엄마랑 말다툼만 안 했더라면—엄마가 사이버덱만 부수지 않았더라면—그는 집을 나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영안실에 누워 있는 건 엄마가 아니라 자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냥… 존재를 멈췄겠지.
지금 와서 빠지면 더 위험해진다.
게다가 밀레나는 아마 장비를 돌려달라고 할 것이다.
이 연극을, 이 허세를, 현실적으로 얼마나 더 끌 수 있을까?
어떤 각도로 봐도 확률은 그들에게 불리했다.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결국엔 진다.
어떤 사람들은 바트모스가 의식을 넷으로 옮겨 아무도 찾지 못하게 했다고 믿는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자기 일부만 옮겼다고 말한다.
지시를 수행할 AI, 스스로 실행되는 유언장 같은 것.
하지만 그건, 그가 유명해진 그 야망의 냄새가 아니었다.
그리고 철학적으로는 이런 반박도 있다.
의식을 ‘옮기는’ 게 가능하다고 해도 그건 결국 시뮬레이션에 불과할 거라고.
하지만 바트모스가 쓰던 시대에는 알버트가 지금 손에 넣은 수준의 기술이 없었다.
뇌 안의 모든 원자—중성자, 양성자까지 포함해서—그 양자 상태를 통째로 옮긴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면 기껏해야 뇌의 ‘패턴’만 건너편으로 던질 수 있을 뿐이다.
부팅되면 디지퍼펫이 된다.
원본을 흉내 내고 진짜인 척하는 인형.
인간의 중추신경계는 인간이 만든 컴퓨터와 근본적으로 맞지 않는다.
컴퓨터는 논리 회로 기반이다.
명확한 질문과 명확한 데이터가 주어지면 명확한 결과를 뱉는다.
반면 뇌는—가장 가까운 비유를 고르면—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닮아 있다.
정의상, ‘완벽한 복제’를 허락하지 않는 구조다.
다시 말해, 인간 정신을 옮길 수 없는 이유는 기술 부족이 아니라 현실 자체의 성질 때문이었다.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한 매체를 읽어서 다른 매체에 그대로 써넣는 수준이 아니라, ‘깊은 변환’. 사진가가 아니라, 천재 화가가 필요한 작업.
알버트의 티어3 넷러닝 리그는 스스로 배웠다.
사용자 스캔을 통해 움직임, 취향, 기억을 학습하며 최적화되는 구조.
그 과정은 메모리를 아끼려고 낮은 우선순위로 백그라운드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알버트는 우선순위를 거의 최대로 끌어올리고 그 학습을 자신의 모든 프로그램으로 확장했다.
이제 그들은 접근 가능한 모든 것을 흡수할 것이다.
전체 과정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버트도 몰랐다.
어떤 이들은 ‘몸 없는 정신은 없다’고 믿는다.
의식—뇌와 중추신경계의 양자 상태 총합—을 어떤 기계로든 옮기는 순간 정보는 대혼란에 빠진다는 주장이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한순간 의미를 잃는다. 처리할 방법이 없으니까.
아주 복잡한 기계를 마지막 나사까지 전부 분해해 바닥에 한 무더기로 던져놓고 “자, 이제 다시 돌아가라” 하고 기다리는 것과 같다.
알버트는 정신과 몸이 붙박이처럼 한 몸이라고 믿지 않았다.
정신은 그냥 세입자다. 갇힌 세입자.
1년 전, 재팬타운 도서관에서 데이터 하비스트를 하던 중, 그는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실험에 관한 글을 발견했다.
거의 300년 전, 라부아지에는 잘린 머리도 산소만 있으면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 했다.
프랑스 화학자는 그 실험을 자기 몸으로 치렀다—자발적이진 않았지만. 프랑스혁명 때 참수당했으니까.
처형 전에 그는 조수에게 말했다.
목이 잘린 뒤에도 가능한 오래 의식을 붙들기 위해 눈을 깜박이겠다고.
그는 20초 동안 깜박였다.
알버트는 그 이야기가 신화라고 반박하는 글도 찾아냈다.
하지만 핵심은 남았다.
그가 가려는 곳에서는 산소가 필요 없다.
아니, 물리적인 몸 자체가 필요 없다.
그는 ‘순수한 의식’으로 살아남을 것이다.
—
"사우스 글렌? 여긴 거의 퍼시피카잖아."
"어딜 가든 거기서 거기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 씨발, 도시 밖으로 빠져나온 느낌인데. 라펜 시브랑 마주치기 싫어서 빙빙 도는 것처럼."
이 동네는 확실히 황량해 보였다. 하지만 착시였다.
여기 사람들은 길이나 인도 같은 ‘트인 공간’을 피했을 뿐이다.
오후 더위도 한몫했다.
그래도 미니마트는 문을 열었고 키 작은 납작한 건물들이 만드는 서늘한 그늘에는 몇몇 사람들이 숨어 있듯 어슬렁거렸다.
"멈추지 마."
조르가 말했다.
"보이지?"
론이 핸들을 꺾어 가속했다.
"너도 느끼잖아."
그들은 신호를 기다리며 동네를 빙빙 돌았다.
여기서 차를 세우면 잔챙이 사기꾼이든 최소한 노숙자든 반드시 달라붙는다.
아니면 저 어두운 골목에 처박혀 있는 ‘누군가’가.
"근데 총이 왜 더 필요해?"
론이 물었다.
"지난번 일로도 좀 챙겼잖아."
"그건 싸구려야."
조르가 대꾸했다.
"그럼 네 저격총은? 내 눈엔 고철로 안 보이는데."
"근접전에 못 써."
"아이러니하네."
론이 킥 웃었다.
"알지, 나 가끔 내 이름이 그래서 ‘론’인가 싶더라. 아이러니(iron-y). 언젠가 부모 만나면 물어봐야지. 내가 말하려는 건—이 돈, 더 똑똑하게 쓸 수도 있다는 거야. 투자라는 건 알겠는데… 언제쯤 본전 뽑냐?"
"누가 또 우리 죽이려 드는 순간. 그날이 머지않을 거야."
뒷좌석의 아야는 눈이 푸르게 깜박이며 메시지를 스캔하고 있었다.
상황이 바뀌면 기대도 이렇게 바뀐다.
예전엔 나이트 시티의 어두운 인간들하고 엮일 일만 없기를 바랐다.
지금은 그들이 빨리 연락해 줄리에나를 어디에 숨겨뒀는지 말해주기만을 거의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가로 뭘 원하든.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한 단어로 줄이면 ‘궁핍’이었다.
진열창이 수십 야드나 이어지던 백화점들은 이제 조그만 가게들로 쪼개졌거나 아예 판자로 막혀 있었다.
버려진 차들이 줄줄이 지나갔다—나이트 시티의 더 나쁜 동네에선 흔한 풍경.
버려지지 않은 차들도 다른 곳보다 더 너덜너덜해 보였다.
이 시간대면 보통은 열기를 막으려고 주택 블록 창문을 셔터나 커튼으로 가리고 있다.
그런데 창이 열려 있다면 대개 그 안은 비어 있다고 봐야 한다.
차 안 에어컨이 우웅 하고 크게 울었다.
론은 에어컨을 껐다가 창문을 열었고 곧 결론을 내렸다.
약한 에어컨이라도 바깥에서 들어오는 뜨거운 바람보단 낫다.
"아냐, 씨발, 난 못 해."
론이 좌석에 등을 기대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우리 여기서 그냥 뜨자."
거의 비어 있는 거리, 건물 그림자 아래에 회색 밴이 서 있었다.
덩치 큰 놈 둘이 그 차에 기대 서 있었다.
"세워."
조르가 말했다.
"미쳤어? 저 덩치들 안 보여?!"
론이 소리쳤다.
"저놈들이잖아. 무기상. 차 세워. 여긴 글렌이라고. 우리한테 뭐 못 해."
론은 그래도 거리를 두려고 몇 야드 더 가서 멈췄다.
"진짜 할 거야?"
그가 불안하게 물었다.
"워든이 추천했잖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난 이 차에서 안 내릴 거야."
"좋아. 그럼 엔진은 켜 둬."
조르가 문을 열었다.
"나도 같이 갈게."
아야가 내렸다.
열기가 정말로 견딜 수 없었다.
"꿰맨 데 조심해."
론이 조르에게 말했다.
"갑자기 움직이지 말고."
둘은 무기상들에게 걸어갔다.
한 놈은 돼지 얼굴, 다른 놈은 호랑이 얼굴. 애니멀.
"별로 믿음직해 보이진 않는데."
아야가 작게 말했다.
"믿을 만한 무기상이 어딨어?"
"…너 괜찮아?"
"괜찮아."
조르가 허리를 폈다.
실은 온몸이 아팠다—본능적으로 몸을 숙이고 싶었지만 꾹 눌러 담았다.
"다 괜찮아."
그들은 밴에서 몇 피트 떨어진 곳에 멈췄다.
아야는 조르의 어깨 뒤에 섰다.
애니멀즈는 냄새가 지독했다.
그게 컨셉인지 아니면 그냥 씻지를 않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전자 때문에 후자가 된 걸지도.
셋은 잠깐 서로를 쳐다봤다.
애니멀즈는 대놓고 아야에게 흥미를 보였다.
"권총 네 자루 필요해."
조르가 인사도 없이 말했다.
"작은 거 두 자루. 렉싱턴이나 비슷한 걸로. 그리고 구경 큰 거 두 자루. SMG도 네 정. 사라토가면 좋고. 프래그 수류탄 열 개. 있어?"
빅 캣이 고개를 비스듬히 꺾었다.
말 없이 피그페이스가 밴 뒤문을 열고 상자 두 개를 가장자리로 끌어다 열었다.
조르가 다가갔다.
한 케이스에는 폼에 맞춰 시구레 열 자루가 박혀 있었고 다른 케이스 두 개엔 펄서와 탄창 더미가 들어 있었다.
전부 확실히 중고였다.
아야는 그 자리에 굳었다.
공포 때문인지 그 악취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어때?"
잠깐 뒤 빅 캣이 물었다.
"거래할 거야?"
"응."
조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SMG 네 정은 새 걸로 필요해, 새 거."
피그페이스가 조르 신발 옆에 침을 퉤 뱉었다.
“하, 그럼 이건 어때?"
피그페이스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는 적재함으로 뛰어올라 네모난 케이스를 하나 더 꺼냈다.
"보강된 군용 물건이야. 딴 데선 못 구하는 거지."
케이스 안에는 이번엔 번쩍거리는 새 권총들이 수십 자루 누워 있었다.
조르가 렉싱턴을 집었다.
시리얼도 마킹도 없었다.
"가져가든가 아니면… 바이스 버사(vice versa)."
조르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프랑스어로 '좆까'라는 뜻이지."
피그페이스가 설명했다.
"살 거야, 말 거야?"
"주문도 가능해."
빅 캣이 거들었다.
"근데 며칠 걸리지. 선불."
"아니, 지금 바로 살 거야."
조르가 말했다.
"시구레 네 자루, C.A.L. 두 자루, 렉싱턴 두 자루. 탄도. 군용 등급으로."
"거기 그 꼬마 인형도 끼워주면 지금 당장 다 넘겨주지."
빅 캣은 아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입술을 핥았다.
"그건 거래에 없어."
조르가 말했다.
"현금으로 계산할게."
아야가 이를 악물었다.
허리 뒤에 꽂힌 권총이 용기를 조금은 줬다.
빅 캣이 가까이 다가왔다.
냄새가 확 밀려와 아야는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그냥 돈만 챙기겠다고 하면 어쩔래?"
그는 아야를 보면서도 조르에게 말했다.
"너희가 우릴 막을 만해 보이진 않아보이거든."
"우리 쪽 사람이 뒤에 대기 중인데."
조르가 SUV를 가리켰다.
허술한 협박이었지만 애니멀들은 그걸 알 방법이 없었다.
"이미 방아쇠에 손도 올리고 있을 걸."
별 반응이 없었다.
아야는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온몸을 바짝 긴장한 채 기다렸다.
머릿속에선 이미 총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최후의 수단.
사실 이길 확률은 거의 없다.
"차에나 처박혀 있는 걸 보니 배짱이 그리 세진 않네."
빅 캣이 비웃었다.
"너희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나설 것 같지도 않고."
그가 아야 쪽으로 손을 뻗자 아야가 재빨리 한 걸음 물러섰다.
애니멀은 퍽 소리 나게 웃더니 아야 앞 공기를 역겹게 킁킁 들이마셨다.
"젠장, 생긴 만큼 냄새도 좋네. 그래서 거래할 거야, 말 거야?"
조르가 아야와 애니멀 사이로 몸을 끼웠다.
"현금."
"렉스는 500. C.A.L.은 600. SMG는… 800으로 치자."
조르가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꺼내 세고 빅 캣에게 건넸다.
"흥정도 안 해?"
빅 캣이 송곳니를 보이며 웃었다.
"통하긴 하고?"
조르가 남은 돈을 주머니에 넣고 무기를 가방에 쓸어 담았다.
들어 올리려다 쑤시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렸다.
아야가 눈치를 채고 바로 달려와 가방을 낚아채 SUV로 옮겼다.
"탄약."
아야가 돌아서며 딱 잘라 말했다.
"인형이 말도 하네."
피그페이스가 킥킥댔다.
"그건 현물로 내도 되는데, 예로 들어…"
하고 낄낄거렸다.
"현금으로 낼 거야."
조르가 어깨를 주무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친구, 뭘 그렇게 빡빡하게 굴어? 인형은 또 새로 하나 구하면 되잖아."
"탄 있어, 없어? 없으면 다른 데서 사러갈 거야."
"그럼…"
빅 캣이 케이스를 밴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 인형 한 시간만 빌려주면, 탄은 공짜로 줄게."
"방금 말했…"
조르의 온몸이 굳었다.
약함을 숨기려면 지금 가진 힘을 전부 끌어써야 했다.
갑자기 애니멀 둘이 얼어붙었다.
피그페이스가 재빨리 밴 뒷문을 쾅 닫았다.
아야와 조르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다음은 순식간이었다.
타이어 긁는 소리와 함께 NCPD 순찰차 두 대가 옆에 멈춰 섰고 경찰 네 명이 쏟아져 나왔다.
아야가 허리 뒤에 찬 권총으로 손을 뻗었지만 조르가 중간에서 팔을 붙잡아 멈췄다.
"꺼져, 돼지새끼들아! 한 달치 선불로 냈잖아!"
빅 캣이 소리쳤다.
"너희 보러 온 거 아니야."
선임 경찰이 손목 디스플레이를 한번 보고 다시 조르와 아야를 훑었다.
"현시간부로 체포한다. 묵비권이 있고, 뭐 그런 거."
–
헤이우드 3번 공립 도서관에서 뽑아낸 데이터는 생각보다 대박이었다.
쓸만한 조각들 사이에 블랙월의 작동 방식에 관한 글도 들어 있었다.
이런 종류의 정보는 보통 빡세게 검열되거나 아예 공개 데이터에서 통째로 지워진다.
누군가가, 넷에서 떨어져 표류하는 이 ‘무인도 같은 도서관’을 그냥 까먹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다만 그 글은 30년 전 자료라 최신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신뢰도도 애매했다.
그래도 글쓴이가 아는 것보다 더 아는 척을 했든 말든 읽어볼 가치는 있었다.
블랙월은 고정된 벽이 아니었다.
보안 체계는 끊임없이 변했고 단단한 콘크리트 장벽이라기보단—다가오는 모든 걸 갈아버리는 수백만 개의 작은 회전 칼날 덩어리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완전히 뚫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틈은 있다. 게다가 벽의 양쪽은 기능적으로 독립돼서 각각 위협을 따로 감시하면서 서로 데이터를 주고받았다.
방어를 계속 최적화하는 식으로.
알버트도 더 최신이긴 한데 덜 믿을 만한 경로로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정리하면 시스템은 스스로 학습하고 스스로 최적화한다.
다만 뼈대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블랙월을 뚫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벽의 한쪽인 척’ 사칭하는 거다.
수년간의 시도들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게 아니라 지금 장비로는 수준이 안 된다는 것만 증명했다.
원격 접속으로 시도하면 넷워치나 NETSEC AI 순찰에 100% 걸린다.
알버트가 ‘전용 서비스 허브’를 독점 접근할 수만 있다면 모를까. 근데 그건 말이 안 되지, 솔직히.
첫 번째 난관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거다.
—
론은 이 SUV를 설계한 병신들을 목졸라 죽이고 싶었다.
트렁크가 열려 있으면 바퀴가 자동으로 잠길 뿐만 아니라 운전석에서 트렁크를 닫는 버튼도 없었다.
론은 ‘기적’이나 오길 바라며 꼼짝 못 하고 앉아 있었다.
차에서 내리면 끝장이다.
서른 피트도 안 되는 거리에서 애니멀 둘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차를 쳐다보고 있었다.
관심 잃고 그냥 가줄까? 그럴 리가.
둘은 확실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론은 길고 마른 다리가 허락하는 한 최대한 시트에 파묻혔다.
마지막 발악으로 문을 잠갔다.
소용없었다. 피그페이스가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문이 그대로 열렸고 잠금장치 금속 부품이 아스팔트에 덜그럭 부딪혔다.
좆됐다.
피그페이스가 론의 스웨터 깃을 낚아채 공중으로 들어올리더니 애 새끼 내려놓듯 가볍게 바닥에 내려놨다.
"이야, 여기 누가 있네?"
피그페이스가 히죽 웃었다.
"개인 공간."
론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런 말 들어본 적은 있어?"
"그래, 빚을 갚는다"
"라는 건 들어본 적 있냐?"
빅 캣이 받아쳤다.
"너희가 이틀 준다며."
"그리고 너는 훔친 물건 판다며."
빅 캣이 트렁크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근데 총은 왜 이렇게 많아?"
론은 한숨을 쉬고 머리를 굴렸다.
지금 자신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죽이면 에디를 못받을 테니까.
"그러니까… 지난번에 얘기를 전부 한 건 아녔거든."
론이 말을 골랐다.
"누가, 음… 그래, 누가 그걸 가져갔거든. 그 ‘물건’을 되찾으려면 총이 필요해."
"‘그 물건’이 뭔데?"
피그페이스가 물었다.
론이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건… 됐어. 아무튼, 팔려면 되찾아야 한다고."
빅 캣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그냥 여기서 너 죽여버리고—손해 봤다 생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그, 그 컨테이너 값이 어마어마해!"
론이 급히 튀어나오듯 말했다.
"컨테이너?"
"밀리테크에서 훔친 거 있잖아. 들어봤을 거 아냐…"
애니멀 둘이 서로를 쳐다봤다.
"얼마나 하는데?"
"확실히는 몰라."
론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 전문이 아니라서."
그는 자세를 바로 하고 셔츠를 쓸어내렸다.
"대충… 존나 큰돈. 그렇게 보고 있어."
"니 새끼 주제에 존나 큰돈이라…"
피그페이스가 중얼거렸다.
"그게 에디로는 얼마냐?"
"내가 빚진 거보다 몇 배는 된다고 장담해."
론이 말했다.
"그럼…"
빅 캣은 액수를 머릿속에 넣어보려다 실패한 얼굴이었다.
"언제까지 가져올 수 있는데?"
론이 침을 삼켰다.
"탄약까지 포함해서… 음… 이틀. 길어도 이틀."
"더 좋은 생각이 있는데."
빅 캣이 말했다.
"우리가 직접 되찾아주면 어때? 어디 있는지 말해. 뱉어."
론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오길 바라진 않았다.
"몰라."
—
죽으면 게임 오버다. 백업 따위는 없다.
이 뻔하고도 끔찍한 사실 하나만 봐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완벽과는 거리가 먼지’ 증명된다.
뇌는 말도 안 되게 많은 데이터를 저장하고 처리한다.
저장 용량은 몇 페타바이트에서 몇백 페타바이트까지 처리 능력은 테라플롭 단위까지—추정치가 널뛰기를 하긴 한다.
과장이 섞였을 수도 있다.
그래도 몸의 핵심 작동은 신경계가 맡는다.
그쪽은 건너뛰어도 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인슐린이 필요 없으면 췌장이 대체 왜 필요하겠어?
마음만 먹으면 의식도 압축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날로그 신경 처리를 16비트로 디지타이즈하는 것도 가능하냐고? 알버트는 몰랐다.
30년 전부터의 실험 기록을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으니까.
유물—렐릭을 제외하면
그동안 크게 바뀐 게 없다면
비약적으로 발전한 건 군사 기술뿐일 테고 알버트는 그쪽엔 손이 닿지 않았다.
진짜 한계는 컴퓨터나 신경망의 성능이 아닐지도 모른다.
전체 과정에서 돌릴 ‘스레드’ 수가 뉴런 수와 맞아떨어지느냐—물론 생물학적 기능 담당 뉴런은 빼고—그게 문제다.
그래야 의식 시뮬레이션의 ‘충실도’가 얼마나 유지될까? 알 수 없다.
오히려 좋아질 수도 있다.
몸이 마음을 누르던 압력이 사라지면 게으름도 피로도 조급함도 같이 사라질 테니까.
몸이 의미를 잃으면 얻는 게 더 많지 않나?
물론 반대도 가능하다.
환경 압력이 사라지면 동기나 추진력이 약해질 수 있다.
뭐, 그런 건 나중에 알버트가 “펴면” 되는 작은 주름일 뿐이다.
그래도… 전부를 압축한다 해도 인간 정신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컴퓨터나 처리 센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블랙월 ‘이쪽’에는.
그럼 ‘중요한 기억’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잃지 않으려면 백업을 얼마나 자주 해야 하지? ‘같은 사람’으로 남으려면?
그리고 죽고 나면 그 백업을 어디에 업로드할 건데? 자기 시체는 당연히 아니고.
그렇다고 새 ‘빈 몸’이 어딘가에서 생산돼서 팔리는 것도 아니지 않나.
설령 중앙신경계 시냅스의 ‘전체 양자 상태’를 처리할 만큼 강력한 기술이 있다 쳐도—그다음은?
역으로 어떻게 되돌리나? 생뇌에 원시 데이터를 어떻게 써넣지? 말이 안 된다.
결국 죽으면 디지털 복사본은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인간 정신의 디지타이즈가 ‘편도 티켓’이라는 생각이 알버트에게는 전혀 섬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전이가 완성되려면 원본은 파괴돼야 한다.
전이란—복사하고 원본을 없애는 일이다.
과정이 끝났을 때 자기 육체가 어떻게 되든 알버트는 상관없었다.
확실한 건 하나. 사후의 삶은 가능하다.
블랙월 너머에서.
10-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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