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도, 조니도, 사부로도 결국 "나"가 아니다

 

"복제가 나와 완전히 동일하더라도 그건 내가 아니라 단지 나를 매우 잘 시뮬레이션하는 타인일 뿐이다."

영국의 철학자, 데렉 파핏이 했던 말인데 난 이 말이 사이버펑크 장르의 핵심에 근접했다고 생각함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블레이드 러너, 매트릭스, 공각기동대를 비롯한 수많은 사이버펑크 작품에서 되풀이되어 왔던 질문이기에 사펑이 발매된 지 5년이 지난 지금 이 주제로 다시 해석글을 쓰는 건 철 지난 묵은지를 꺼내는 심정이다만 쉰김치 부대찌개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붕이들이 있을 테니 글이 많이 지루하고 현학적이더라도 맛있게 읽어주길 바람


1. 테세우스의 배

이건 굉장히 유명한 형이상학적 난제라 한 번쯤 들어봤을 거임

과연 정체성은 변화를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까? 가 이 논제의 핵심인데 개인적으로 이 논제가 아직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논제의 근거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일단 테세우스의 배는 은연중에 정체성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질문을 던지는데 나는 오히려 정체성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고 생각함

이유는 다음과 같음


2. 실존주의

실존주의는 인간에게 가장 두려운 공포가 죽음과 무의미, 자기 상실이라고 함

이걸 한 데로 엮으면 허무에 대한 공포라고 할 수 있겠음

인간은 허무를 아주 두려워함

그렇지 않으면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전 세계에 내세를 보장하는 종교들이 수없이 생기진 않았겠지

허나 안타깝게도 사후 세계는 존재하지 않음

아직 증명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만 실존한다고 입증이 안 됐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함

그런데도 인간은 계속해서 사후세계를 찾고 내세를 바람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허무가 너무나도 두렵기 때문에 인간이 필사적으로 정체성을 찾는 이유도 이와 같음

애초부터 우리의 정체성이란 건 '나'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인정하면 '지금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낯설고 두렵게 다가오기 때문임

당장 나는 사실 복제인간이었고 저 먼 어딘가에 나도 모르는 원본이 존재한다거나 사실 나는 입양된 자식이었고 내 진짜 부모는 저 먼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해보셈

이것만 해도 자신의 존재에 대해 겁이 덜컥 나는데 애초에 '나'라는 게 없다면 그 공포가 얼마나 하겠음?

그래서 인간은 사후세계의 존재를 필사적으로 찾는 것처럼 자아와 정체성을 필사적으로 찾는 거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무서우니까 테세우스의 배 논제가 아직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라고 생각함

정체성은 변화를 얼마나 함유할 수 있냐는데 애초에 변화를 함유할 정체성이란 건 없단 말임?

질문의 근거가 잘못되었으니 명쾌한 답이 나올 수 있을 리가...


3. 뇌 가소성

테세우스의 배 논제 속 변화에 대해 더 말하자면 인간의 모든 정신 활동의 중추이기에 불변하리라 여겼던 뇌도 사실은 계속 변화하고 진화함

이런 뇌 가소성은 이미 과학적으로 광범위하게 관측되고 실험적으로 입증된 현상임

그렌라간의 명대사처럼 우리는 1분 전의 우리보다 진화하고 이 글을 읽는 지금조차 우리의 뇌와 몸은 세포 단위의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음

때문에 설령 정체성이 실존한다고 쳐도 그것을 육체에서 찾으려 하면 안 됨

뇌 또한 육신이라는 물리적 하드웨어의 일부일 뿐이니까

그러면 과연 정체성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의 개념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4. 기억 흔적

나는 인간의 기억이 그 해답이라고 생각함

아주아주 미세한 마이크로 관점에서 보자면 기억 또한 0과 1로 기록할 수 있는 전기 활동에 불과할 수 있지만 무언가 영적인 의미를 찾는 데에는 기록과 경험 말곤 없다고 생각함

우리가 흔히 '정신'이라고 부르는 개념이 인지 능력의 연장선이기 때문임

흔히 지인을 못 알아보는 치매 환자 보고 "정신이 혼탁하다"고 하잖음? 그런 맥락임

그렇다면, 작중에서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부활한 V와 조니, 사부로는 과연 "자신"들이 맞을까?

이제부터는 장르가 장르인 만큼 컴퓨터와 제품에 비유해서 설명해봄


5. 진품 가품

단언컨대 그들은 결코 생전과의 동일인물이 아님

우리들은 부모라는 공장으로부터 생산된 세상에 단 한 체밖에 없는 제품임

그렇게 태어나서 살다 보면 문신 하듯 케이스에 스티커도 붙이고 임플란트 박아 넣듯 그래픽카드 바꿔 달고 쿨러 업그레이드하고 그러겠지

뇌라고 생각되는 CPU도 상위 제품으로 바꿔 끼고 말이야

그렇게 1060 싸구려에서 5090을 달게 된 슈퍼컴은 더 이상 예전에 쓰던 컴퓨터가 아님

그저 메모리에 내재된 데이터(기억)만 연속적으로 이어질 뿐 그밖에 동일한 것은 하나도 없음

탈 것으로 비유하면 더 이해하기 쉬움

처음에 네 발 자전거 타다가 두 발 자전거 타고, 두 발 자전거가 바이크로 바뀌고 바이크는 소형차로, 소형차는 중형차로, 중형차는 버스로 바뀐 격이니까

여기서 동일한 건 탑승객(기억)이 똑같이 이어진다는 사실 뿐이지

그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전기 신호의 기록이야말로 우리가 정신이나 영혼, 자아 혹은 정체성, 궁극적으로는 '나'라는 개념의 실체라고 생각함

그런데 여기서 아라사카는 렐릭 프로그램을 내놓으면서 우린 영생을 줄 수 있다고 아주 당당하게 말함

그런데 그 실체를 까보면 네 컴퓨터 CPU 기판 구조랑 그 안에 든 데이터 싹 복사해서 나중에 고장 나면 바꿔 넣어줄게←이거밖에 안 됨


위 예시 사진으로 든 짱깨산 가품과 다를 바 없음

레시피, 디자인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내놓으면 과연 그것을 오리지널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내가 쓰던 컴퓨터 기판이 고장 나서 동일한 모델로 교체하고 그 안에 든 데이터도 똑같이 붙여 넣으면 그것은 여태껏 내가 써왔던 컴퓨터가 맞는가?

내가 뇌사한 후에 손상된 뇌의 유기체를 똑같이 복원하고 그 사이로 흘러내린 기억마저 똑같이 복원해내면 그건 여전히 나인가?

복원이 불가능하다면 손상된 뇌를 갖다 버리고 모든 구조와 기억이 동일한 새 뇌를 탑재해 움직이게 된 내 몸은 여전히 나인가?

더 나아가 데렉 아저씨 말처럼 나는 멀쩡히 존재하는데 1초 전의 나와 똑같은 복제가 생겨나면 그것도 나인가?

결코 아니지

우선 우리가 오리지널리티 원본이라고 여기는 개념은 방금 위에서 말했듯 사후세계처럼 실존하지 않음

우리가 "나"라고 믿고 인식하는 것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믿음의 그림자일 뿐이고 "나"의 실체는 끊임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기억의 흐름이기 때문임

더불어 이 연속성이야말로 "이거 진품임" 하고 박아주는 인증 마크라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아래와 같음


6. 순결성


킹황스매셔님한테 긁힌 이블린이 곧바로 리퍼닥을 찾아가서 소중이 재건술을 받아본다고 치자

그렇게 찢어진 처녀막을 복원하면 이블린은 다시 처녀가 될 수 있을까? 당연히 없지

왜냐면 한 번 순결이 깨졌으니까

사이버펑크 장르에 절대불변의 개념이 있다면 나는 그게 죽음이라고 생각함

죽음은 곧 순결의 종말임

아라사카가 아무리 렐릭으로 소중이 재건술을 개발했다고 떠들어도 V도 조니도 사부로도 사망한 과거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음

심지어 V는 덱스한테 한 번, 미코시에서 한 번, 총 두 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남

이렇게 부활한 V는 결코 예전의 V가 아님

그저 V라는 하드웨어 바톤을 넘겨 받은 서로 다른 이어달리기 주자일 뿐임

머리에 총 맞기 전의 V를 V1이라고 하면 렐릭으로 부활한 V는 V1의 기억과 사고방식을 그대로 물려받은 V2임

그리고 미코시에 들어갔다가 부활한 V는 V1의 기억과 사고방식을 잇는 V2의 기억과 사고방식을 잇는 V3임

루트에 따라 V의 몸을 빌려 부활한 조니도 아들의 몸을 장악한 사부로도 똑같음

이들의 진정한 원본은 사망한 순간 연속성이 끊겨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음

부활했다고 말하는 그들은 사실 특정인의 기억을 갖고 특정인처럼 생각하고 특정인처럼 행동하지만 근본은 전혀 다른 이제 막 태어난 별개의 누군가임

쉽게 말하면 자신을 V라고, 조니라고, 사부로라고 생각하는 정신병자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음

여기까지 생각하니 아라사카가 렐릭 이름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함

"기억 흔적"은 결코 원본 "기억"이 될 수 없으니까


7. 연속성

여태껏 떠든 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음

일단 '나'라는 개념이나 '정신'이란 건 존재하지 않음. 우리가 그렇다고 여겨왔던 건 그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기억의 흐름을 우리가 안심할 수 있도록 듣기 좋게 포장한 것뿐임

설령 그런 개념이 실존한다 쳐도 그것은 결코 육신에서 찾을 수는 없음

인간의 육신은 뇌를 포함해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

그러니 이렇게 실시간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흐름 '기억의 연속성'이야말로 우리가 '나'라고 믿는 것의 정체이자 '원본'임을 보증함

하지만 V와 조니, 사부로는 작중에서 한 번 이상의 죽음을 맞이함

재건술을 받아도 한 번 뚫리면 더 이상 처녀가 아닌 것처럼 사망에 이르러 연속성이 끊긴 이들은 부활해도 결코 이전과 동일한 존재가 아님

모바일겜 로그인 보상 시스템 생각하면 편함

아무리 계정 데이터가 유지되어도 접속 하루 끊기면 누적 보상 1일차로 리셋되잖음?

'나'라는 기억의 연속성도 마찬가지임

아무리 수없이 부활할 수 있어도 사망으로 단절되면 더 이상 '누적 보상 NN년 차의 나'는 존재하지 않음

그 순간부터는 완전 별개인 '누적 보상 1일 차의 나'가 새로이 존재할 뿐임

데렉 아저씨의 말이 사펑 장르의 핵심이라고 서두에 소개한 이유가 이 때문임

복제가 원본과 완전히 동일하더라도 그건 원본이 아니라 단지 원본을 매우 잘 시뮬레이션하는 타인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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