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겐 협상 카드가 없어요, 이 자리는 우리 쪽 윗선이 전해주는 최소한의 성의일 뿐이고.”
“아에네아스 프로젝트에 관한 정보를 우리가 확보하지 못했다면 그 ‘성의’도 필요 없었을 텐데요.”
카츠오가 미소 지었다.
“우리의 목표는 균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당사의 철학은 그림자 아래서 살아남는 다른 소규모 기업들과 달리 이윤 숭배에 기반하지 않습니다.
위대함으로 가는 길은 탐욕으로 포장되지도 않죠.”
회의실은 벽에 걸린 일본 두루마리—검은 붓질로 그린 백조—와 구석에 얌전히 놓인 분재만 빼면 어디에나 있을 법했다.
굳이 어디인지 상기시키는 장치처럼.
“저희는 협력하는 것이 양쪽 모두의 이익이라고 생각합니다.”
밀레나가 말했다.
“상호 보안을 강화할 수 있는 몇 가지 기술적 해법을 저희가 제공할 수도 있죠.”
“보안이 최우선인 것은 사실이죠.”
카츠오가 인정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아직 개발에 착수하지 않았습니다.”
“15년 전 일을 다시 겪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밀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협력하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 기술에 대한 존중은 있으나 이번 경우에 그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하지 못하겠군요. 우리는 우리만의 해법을 갖고 있습니다—제가 알기로는 귀사보다 한 세대는 더 앞선 기술이죠. 이 대화의 목적은 양측 고용주 누구에게도 불공정하게 비치지 않을 상호 이해를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희가 귀사의 일에 끼어들지 않도록 확실히 해두고 싶다는 말이군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밀레나는 그 자기절제의 벽에 균열이 가는 장면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 균열이 생긴다면 자신이 그것을 직접 목격하는 입장이 되진 않기를 바랐다.
—
“뿌려, 이 멍청아.”
“왜 또 나야, 잭?”
“그게 일이니까. 네가 고른 거잖아, 기억 안 나?”
“내가 고른 거 아니야. 어디에서도 날 원하지 않았어.”
“왜 그랬는지 생각해본 적은 있고? 없어? 그럼 뿌려.”
모리스는 무거운 탱크가 달린 백팩을 들어 메고 장갑 낀 손으로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두꺼운 주황색 수트는 움직일 때마다 끽끽거렸다.
주황색은 언제나 더러운 일이란 뜻이었다.
잭은 도구 가방을 집어 들고 밴 뒷문을 쾅 닫았다.
넓고 텅 빈 주차장 안에 메아리가 퍼졌다.
“넌 내 보스 아니잖아.”
모리스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리고 지랄마, 이거 내가 뿌리는 것도 벌써 세 번째라고 파트너인 줄 알았는데?”
“그래, 멍청아. 네 말이 다 맞아.”
“왜 계속 그렇게 불러?”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
“내 이름은 모리스야. 조르는 날 그렇게 불렀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어.”
“바이어스가 잘랐다면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겠지.”
“밴을 쳐박은 건 나였어. 조르가 날 지키려고 자기 책임으로 돌렸어. 난 운전을 할 줄 몰라.”
“맞다, 그것도 아무한테 말하면 안 되는 거였지?”
잭이 코웃음을 쳤다.
그들은 물에 잠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걸었다.
“아무도 몰라야 해.”
모리스는 수트 너머로 물의 차가움이 스며드는 걸 느꼈다.
“안 그러면 난 잘려.”
“봐. 너 방금 나한테 스콥을 쏟아냈잖아. 그러면서 왜 내가 널 멍청이라 부르는지 궁금해하냐.”
모리스는 더 깊이 들어가다 멈췄다.
오수 수위는 지퍼 몇 인치 아래까지 차 있었다.
더 깊은 곳이 얼마나 되는지 감도 안 왔다.
“잠수복이 필요할 것 같아, 잭.”
그가 말했다.
“더는 못 들어가. 온몸이 다 젖을 거야.”
“누가 네가 들어가야 한다고 했냐?”
잭은 수면 바로 앞 한 계단에서 멈췄다.
그는 손전등으로 물 위를 훑었고 콘크리트 기둥과 강철 캐비닛의 윗부분이 드러났다.
쥐 사체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도 둥둥 떠 있었다.
계단 주변의 물은 두껍고 젤라틴 같은 점액으로 덮여 있었고 그 점액이 부글부글 끓었다.
“수위가 더 올라간 걸까, 잭?” 모리스가 물었다.
“바이어스가 와서 확인한 뒤로 마지막으로 여기 온 게 언제야?”
“한 번도 안 왔어, 멍청아.
돼지처럼 처박혀 앉아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우리가 벌어다주는 돈이나 세는 인간이라고.”
그는 점액을 더 가까이 보려고 쪼그려 앉았다.
콘크리트에 닿지 못하고 여기서 헤엄치다 천천히 녹아버린 수천 마리의 죽은 곤충이 들끓는 끓는 스튜 같았다.
“일이 스스로 끝났네.”
그가 중얼거렸다.
그때 수트의 가스 센서가 갑자기 삑삑 울리기 시작했다.
“씨발.”
그는 서둘러 방독면을 쓰고 필터 밸브를 비틀었다.
“마스크 써, 멍청아! 여기서 나가야 해!”
모리스는 머리가 핑 도는 걸 느꼈다.
그는 마스크를 썼지만 밸브를 찾으려고 손을 뻗자 아무 데도 연결되지 않은 튜브만 만져졌다.
“나 필터 없어, 잭.”
그가 말했다.
“네가 밴에 두고 왔으니까 없지, 멍청아!”
잭은 이미 계단을 뛰어올라가고 있었다.
“그냥 씨발 거기서 나와!”
모리스는 물에서 기어 나와 비틀거리며 앞으로 넘어졌다.
분무 창을 떨어뜨리고 계단에 기대며 한 계단씩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숨 쉴 때마다 더 힘들어졌다.
잭의 주황색 수트가 계단 꼭대기 너머로 사라졌다.
아직도 천 개는 남은 것 같았다.
그리고 각 계단은 점점 더 높아 보였다.
방향도 제각각으로 기울고 파도처럼 오르락내리락했다.
왜 갑자기 이렇게 피곤하지?
등 뒤에서 뭔가가 그의 등을 붙잡고 팔을 조였다.
모리스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몸을 던졌고 네발로 계단을 기어올라갔다.
분무 케이블과 창이 뒤로 질질 끌렸다.
무언가가 더 세게 그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는 바닥으로 비틀거리며 넘어졌고 차고 벽에 축 늘어진 채 기대었다.
잭은 가스 센서를 확인하고 마스크를 올렸다.
“이번엔 진짜 일을 크게 해냈구나, 멍청아.”
그는 이제 마스크를 벗었다.
“바이어스도 이건—”
잭이 홱 돌아섰다.
누군가가 또 있었다.
그래피티로 뒤덮인 벽을 따라 거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이 위협적으로 기어다녔다.
그는 총이 허리 뒤에 있는지 확인했다… 수트 아래에.
“젠장.”
그는 목 아래 지퍼로 손을 급히 가져갔다.
“야, 우리 일하는 거 안 보여—?”
그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붉은 점 몇 개가 떠올랐다.
따뜻하고 젖은 무언가가 모리스의 얼굴에 튀었다.
얼굴뿐 아니라—그 옆 바닥에는 어두운, 기괴한 형체들이 꿈틀거렸고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는 시야 밖 어딘가로 무언가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첫 번째 악마가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모리스 바로 앞에 섰다.
눈이 불타고 있었다.
“조르.”
악마가 으르렁거렸다.
“그 새끼 어디 있지?”
모리스는 애써봤지만 시선이 도무지 초점을 잡지 못했다.
일곱 개의 붉은 눈이 보였다.
아니, 더 많은가?
모든 것이 달콤하면서도 약간 금속성인 냄새로 가득했다—구역질 나게 익숙한 냄새였다.
그는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힘이 없었다.
“조르.”
먼 곳에서 악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리스는 한 지점에 시선을 고정하려 했지만 시야는 위로, 아래로, 옆으로 끌려갔다.
아니면…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걸까?
지구는 돌잖아… 그렇지…?
“조르가 어디 있는지 말해.”
“너희가…”
모리스가 입을 뗐다.
“너희가 여기 온 건… 나 때문에…”
“잡담하러 온 게 아니야. 조르. 어디 있지?”
“조르가 말했어… 너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새끼가 틀렸나 보네. 어디 있는지 말해.”
“말하면 너희가 조르를 해칠 거니까. 너희는 악마니까.”
“그렇게 보진 못했는데. 너, 꽤 호기심이 많구나?”
악마가 말했다.
“어디 있는지만 말하면 널 풀어줄게.”
“싫어. 조르는 날 도와줬어—나한테 잘해줬어. 이제 내가 그를 돕는 거야.”
“슬슬 인내심이 떨어지는데.”
악마가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카를라는 다르지. 끝이 없거든.”
대머리 암컷 악마가 팔을 들어올렸다.
금속성 쉭 소리와 함께 손가락에서 강철 발톱 다섯 개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모리스에게 달려들어 수트를 갈기갈기 찢었다.
피부 일부도 함께.
“끝이 없지…”
그녀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모리스는 약간 마비된 통증을 멀리서 느꼈다.
마치 자기 몸 주위를 공전하는 것처럼.
곧 통증만이 그를 몸에 붙들어매는 유일한 끈이 됐다.
“여자랑 이렇게 가까워본 적 없지?”
그녀가 속삭였다.
—
“10%를 제안하셨네요.”
밀레나가 잠시 멈췄다.
“모호하고 정의되지 않은 무언가의 10퍼센트네요. 왜 하필 그렇게 구체적인 수치죠?”
“협상의 출발점일 뿐이죠.”
카츠오가 답했다.
“어딘가에서 시작해야 하긴 하고 10은 깔끔한 숫자니까.”
“제게는 50퍼센트가 훨씬 더 ‘깔끔’하게 들리는데요.”
“이 프로젝트는 우리가 단독으로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도록 하죠. 당신네들 밀리테크와 협력하자는 제안은 그쪽의 고용주가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일 뿐입니다.”
“그러다간 우리 쪽이 입을 열어 전부 드러날 수도 있겠군요.”
“그건 끔찍한 실수가 될 겁니다. 우리 기업들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주어진 역사적 기회를 탕진하는 일이죠. 아에네아스는 블랙홀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고 무한한 연산 능력일 수도 있고 모든 문제의 해답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미래를 들여다볼 가능성일 수도 있죠.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협상은 구체에 기반할 수 없습니다. 애당초 구체가 없기 때문이입니다. 우리는 단지 언젠가 구체가 드러났을 때를 대비해 상호 이해가 공통의 틀을 만들기를 바랄 뿐이죠.”
밀레나는 물을 한 잔 따랐다.
테이블 위엔 두 잔과 주전자뿐이었다.
모든 전자기기는 방 밖에 두어야 했고—임플란트와 홀로폰도 비활성화해야 했다.
신뢰의 표시 같은 것에 가깝다.
어차피 여긴 북미 전체에서 아라사카의 유일한 본부였다.
카츠오가 듣는 장치를 열두 개쯤 심고 싶다면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아에네아스 프로젝트는 두 기업의 경영진에게서조차 숨겨져야 했다.
결국엔 모두에게 ‘기정사실’을 들이밀어야만 성립하는 도박이었다.
프로젝트의 잠재적 이득은 그만큼 막대해서 누구도 감히 중단시키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소문이 새면 프로젝트에 연루된 모두가 범죄자로 취급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나쁘게—배신자로.
—
딕시의 여윈 몸이 악몽을 꾸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경련했다.
아니면 감전되는 것처럼.
그는 넘쳐나는 쓰레기통들 사이에 앉아 아마 나이트 시티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일 벽돌벽에 축 늘어져 있었다.
카를라는 그가 고개를 뒤로 빼지 못하게 고정해두고 있었고 그의 뒤통수에서 나온 케이블은 벽에 달린 정비 패널에 꽂혀 있었다.
원격 접속 신호가 여러 노드를 거쳐 전송될 때 그의 몸은 가끔 이렇게 반응했다.
그 옆에서 드물게 구름이 갈라진 오후 빛 아래 덤덤은 그렇게 위협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도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나이트 시티 시민들은 자기 일상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상황을 피하는 습관을 몸에 박아두고 있었으니까.
NCPD 순찰차 한 대가 지나가며 거의 멈출 뻔했다—아마 돈 좀 벌어볼까 하며 딱지라도 끊을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덤덤을 한 번 보자마자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천천히 굴러 지나갔다.
‘연결 끊자—과부하 온다.’
카를라가 생각으로 말했다.
‘뭔가 찾기 전엔 안 돼.’
덤덤이 답했다.
잠시 뒤, 딕시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고 케이블을 머리에서 뽑아냈다.
카를라가 그를 안았다가 반사적으로 몸을 뗐다.
지금 그의 몸은 더 많은 열이 아니라 차가움이 필요했다.
냉각 없이 짧게만 다이브해도 체온은 고열 수준까지 치솟았다.
그녀는 그의 이마에 들러붙은 흰 머리카락을 쓸어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그는 정신을 차렸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일어섰다.
‘전송 지연이 몇 초 있어.’
그가 생각으로 말했다.
‘주소를 땄다.’
—
알버트는 최근에 들여놓은 물건들을 가만히 살폈다.
신스-우드로 덮인 콘크리트 바닥 위에 소파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원래 싱크대가 들어갈 구멍엔 이제 싱크대가 들어가 있었다.
부엌에는 냉장고가 있었고 침실에는 침대가 있었다.
두 번째 침실에는 새것 같은 작고 단단한 의자 하나가 있었다.
칠판 긁는 것 같은 삐걱거림도 날카로운 플라스틱 소리도 더는 없었다.
더 중요한 건, 그는 어머니가 부숴버린 것과 똑같은 새 사이버덱 하나와 아주 특정한 게임 카트리지를 샀다는 점이었다.
그는 수년 동안 하드웨어를 업데이트할 필요가 거의 없었다.
사이버덱을 넷러닝 장비의 주력으로 계속 써먹는 데 필요한 건 약간의 인내와 요령뿐이었다.
하지만 알버트가 아무리 원해도 그보다 더 좋은 물건을 손에 넣을 방법은 몰랐다.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다만 자기 안락지대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결국 ‘사이버덱을 자기 필요에 맞춰 개조하고 또 개조하는’ 루틴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로봇 청소기가 바닥을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신스-우드 바닥의 가장자리에 닿을 때마다 멈춰 서서 180도로 방향을 틀었다.
그것도 자기 안락지대 안에서만 작동하고 있었다.
이론적으로 그런 청소기는 영원히 존재할 수도 있었다.
닳거나 고장 난 부품을 새 것으로 바꾸기만 하면 청소기는 지금처럼 계속 기능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 모든 부품을 전부 갈아끼워도 그 청소기는 달라지지 않는다.
테세우스의 배처럼.
갑판의 판자 하나를 바꾸면 그 배는 여전히 같은 배일까? 두 개를 바꾸면? 전부 바꾸면?
사람은 조금 달랐다.
만약 사이버사이코시스를 통제할 방법을 찾는다면 뇌와 척수—그러니까 날 ‘나’로 만드는 두 가지를 빼고는—장기를 전부 갈아끼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알버트는 사람들의 사이보그화 집착은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이 살아가기 위해 계속 새것으로 교체되니까 사람도 결국 배랑 똑같다고 생각하기 쉽다.
거의 맞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반년 전 어느 데이터 수확에서 알버트는 몸의 원자들이 몇 년마다 완전히 교체된다는 걸 알아냈다… 중추신경계에 있는 원자들만 제외하고.
그는 오늘 아침 론에게서 메시지를 세 개 받았다.
그는 답장할 생각도 없이 대충 훑었다.
그 난장판에 엮인 건 실수였다.
게다가 불필요한 위험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남을 위해 감수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열차 사고 같은 강탈극은 혼자 일하는 편이 낫다는 그의 확신만 더 굳혀줬다.
알버트는 유닛 안을 둘러봤다.
지금 집은 그가 지금까지 평생 살던 곳보다 세 배쯤 컸다.
소파에 앉아야 하나… 손을 씻어야 하나? TV를 봐야 하나? 아니면 집에 오면 음식을 구해먹는 게 ‘정상’인가?
그는 완전히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정상인들이 ‘삶’이라고 부르는 걸 어떻게 하는지 그는 전혀 몰랐다.
그래도 최소한 필수는 처리했다.
가구—거실에는 소파가 있어야 한다.
체크.
냉장고엔 음료가 있어야 한다.
체크.
냉동실에는 얼음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체크.
그 얼음을 써먹을 수 있는 2티어 러닝 테크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 그에게 있는 건 공장 설정이 걸려 있어 알버트가 자기 목적에 맞게 쓰지 못하는 원시적인 사이버덱뿐이었다.
이 모델의 보안 기능은 그렇게 정교하진 않았다—납땜 인두와 드라이버만 있으면 설정 변경은 가능했다.
하지만 문을 걷어찰 수 있는데 왜 굳이? 그냥 노크하면 되잖아.
알버트는 카트리지를 포장에서 꺼내 사이버덱에 꽂았다.
푸른 하늘, 짙푸른 물.
따뜻하다
하지만 너무 뜨겁진 않다.
그는 눈을 깜빡인다.
빌라의 하얀 벽이 태양빛을 반사한다.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커튼이 화분에 심긴 토스카나 사이프러스와 나무 데크 체어가 놓인 비현실적인 파티오를 더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그곳엔 사람 그림자 하나 없고—올리브빛 피부의 여자가 흰 드레스를 펄럭이며 서 있을 뿐이다.
그 드레스는 그리스 토가처럼 보인다.
아니면 로마식인가?
“돌아왔네. 드디어!”
엘레나가 미소 지으며 그에게 걸어온다.
“여행은 어땠어?”
코로나도 베이에서 산다고 상상해보자—정확히는 퍼시피카.
낙원 속의 낙원.
“단말기가 필요해.”
그가 대답한다.
“덱, 컴퓨터, 노트북… 그때 뭐라고 불렀든.”
“여행에서 돌아왔는데, 먼저 좀 쉬어야지?”
당연히 그녀는 그를 쉽게 놔줄 생각이 없었다.
“목욕물 받아줄게.”
그녀가 그를 안으려 한다.
“고맙지만 못 해.”
그는 그녀의 품에서 몸을 빼낸다.
“진짜 컴퓨터가 필요해.”
“그럼 옷이라도 갈아입지 않을래?”
그는 흰 리넨 셔츠를 입고 있다.
피부가 쓸린다.
“금방 할게. 지금 당장은 컴퓨터랑 넷 연결이 필요해.”
“노을 보면서 해변 산책은 어때?” 엘레나는 포기할 줄 몰랐다.
“그간 있었던 일 다 얘기해줘. 우리 마지막으로 만난 게 너무 오래됐잖아.”
코드에 오류가 있었다.
지금은 오후였다.
“우리 요즘 너무… 멀어졌잖아.”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네가 돌아왔으니 이제 그동안 못한 걸 다 메울 완벽한 때 아니야?”
그는 허리띠에 고정된 권총의 단단한 윤곽을 느꼈다—이것도 천으로 만들어져 있고 이것도 불편했다.
이 무의미한 잡담을 갑자기 끝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여기서 폭력을 쓰면 다른 플롯라인으로 갈라진다.
그러면 일만 더 어려워진다.
해변 오른쪽 위에 진구지 의류를 광고하는 커다란 빌보드가 있었다.
한 번 시도해볼 만했다.
“오늘 너한테 예쁜 드레스를 주문해주려고 했어.”
그가 말했다.
“너, 진구지 얘기 늘 했잖아.”
이걸로 됐다.
“진짜?”
그녀가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다.
“그럼 지금 하자!”
그녀는 그의 손을 잡고 빌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시원하지만 차갑진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대리석 타일, 1층을 지탱한다는 기둥들, 계단, 처마 장식의 그리스 문양.
아니면 로마식인가?
뭐든. 이 요란한 연극의 목적은 딱 하나였다.
그가 덱의 설정 저장소에 접근하게 만드는 것.
엘레나는 널찍한 침실로 그를 이끌었다.
넉넉한 책상이 있고 그 위에는 프로토타입 컴퓨터처럼 보이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화면에는 진구지 사이트가 떠 있었다.
게임을 통해 무엇을 사든 상관없었다.
마이크로 결제 보안만 꺼지면 된다.
시스템의 사소한 허점—제조사에겐 하찮은 문제였다.
그녀는 다시 기뻐서 펄쩍 뛰더니 방금 손에 ‘생겨난’ 카드를 컴퓨터에 꽂았다.
또 하나의 버그였다.
“너 정말 다정하다. 어서 해. 내 사이즈 기억하지? 그렇지?”
그녀는 계속 그를 들볶을 것이다.
상호작용을 하라고 재촉할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프로그래밍이었다—알버트가 설정에서 골라둔 파라미터와 결합된.
대답할 필요는 없다.
그는 이제 그녀가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원하는 것을 얻었다.
그는 단말기 앞에 앉았다.
노트북이든 뭐든—키보드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터미널을 따로 생성할 필요가 없어 일이 쉬워진다.
알버트는 ‘생각 명령’으로 미리 준비해둔 단순한 코드 문자열을 실행했다.
그는 이 세계의 데미우르고스가 되었고—정확히는 파괴자가 되었다.
그는 가능한 모든 것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다만 약간의 주의는 필요했다.
덱의 내용 전부를 몽땅 날릴 수는 없었으니까.
덱의 핵심 기능을 담당하는 소프트는 남겨둬야 했다—알버트가 지금 들어와 있는 이 게임도 포함해서.
가장 먼저 운영체제의 보안 기능이 사라졌고 그다음은 비필수 그래픽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씩 해체해갔다.
끝내 남은 건 그들이 서 있는 낡아빠진 터미널과 책상 그리고 바닥뿐이었다.
큰 쾅 소리가 그를 집중에서 잡아 끌어냈다.
“빨리, 가야 해!”
엘레나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바다… 바다가… 사라졌어!”
“알아. 내가 없앴어.”
“무슨 소리야? 쓰나미 오기 직전에 딱 그런 일이 벌어지잖아!”
바닥이 떨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난번엔 이런 일이 없었다.
이 게임 물리 엔진 만든 사람한테 박수를 쳐야 할 판이었다—해변에서 물을 삭제한 게 거대한 지각 변동을 유발한 모양이었다.
지진이 나도 광섬유 케이블은 멀쩡하게 유지되도록 설계해뒀길 바랄 뿐이었다.
아니, 이건 평범한 지진 수준이 아니었다.
알버트는 더 잘 보려고 발코니로 나갔다.
엘레나는 비명을 지르며 방 안을 패닉 상태로 뛰어다녔다.
발코니 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놀라울 만큼—그리고 그 리얼함 때문에 더 끔찍할 만큼—현실적이었다.
수십 피트 높이의 파도가 해저를 가로질러 빠르게 밀려오고 있었다.
30초쯤이면 빌라에 닿을 것이다.
알버트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깨달았다—물을 삭제해 생긴 진공이 물을 다시 채워 넣도록 만들고 있었다.
나쁘지 않다. 전혀 나쁘지 않았다.
엘레나는 정신없이 그를 출구 쪽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그는 그녀를 밀쳐내고 재빨리 터미널 앞으로 돌아가 앉았다.
그는 몇 줄의 명령을 거칠게 두드려 넣었다.
그러자 파도는 그대로 사라졌다.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곧 새 파도가 또 생겨날 테니까.
알버트는 사이버덱 메모리 중 ‘삭제 대상에서 제외’할 영역만 표시하고 정리 루틴을 실행했다.
먼저 세계가 흑백으로 바래더니 텍스처를 잃어가며 들쭉날쭉하고 흐릿해졌다.
수평선에 새로 나타난 다음 파도는 다가올수록 빠르게 커지는 구겨진 은박지처럼 보였다.
그는 하늘을 꺼버렸다.
그리고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엘레나는 차가운 타일 위에 무릎을 꿇으며 입술만 움직여 말을 뱉었다.
바닥, 건물의 외벽, 그리고 엘레나 자신까지—그녀 플롯라인의 몇 기가바이트짜리 코드와 함께 사라졌다.
속이 시원했다.
모든 것, 심지어 자기 아바타까지 사라지고 서버에서 접속을 끊자 알버트는 깨끗하고 텅 빈 사이버스페이스에 홀로 남았다.
완벽한 어둠이 그를 둘러쌌다—채워지기만을 기다리는 진공처럼.
새 유닛과는 달리, 그는 이 공간을 자기만의 모델과 디자인과 코드로 어떻게 꾸밀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경이의 동굴’에서 다운로드한 것들로.
하지만 그 전에…안전한 피난처를 만들려면 벽과 보호가 필요했다—사이버스페이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알버트는 그 부분에서 허술하게 굴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마침내, 완전히 새로 지어진 그의 요새이자 피난처에서 그는 평온하게 타란을 완성할 것이다.
—
덤덤은 완전히 매혹됐다.
이런 감정은 보통 예술 작품 앞에서 느끼는 게 맞겠지만 헝클어진 마흔살 연령의 여자 몸 위에 남은 붉은 절개 자국은 묘하게 ‘가지런한’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난장판 속에 묻힌 질서—너무 비인간적이어서 오히려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질서.
유닛은 비좁고 어수선했지만 더럽다고 하긴 어려웠다…
벽과 바닥에 번진 피만 눈 감는다면.
그 피는 카를라의 ‘열정’이 남긴 흔적이었다.
여기서 사는 삶은 대개 이렇다.
거리로 나앉지 않은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달래고 겨우 버티게 해주는 작은 힘에 기대서 하루를 굴린다.
그러다 어느 날, 목적 없이 떠밀려 살던 사람이 갑자기 손을 뻗는다
‘운명’이라는 걸 목덜미 잡듯 붙들고 어떻게든 놓치지 않으려 악착같이 매달린다.
그런데 그건 늘 그렇듯,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빠져나가 버린다.
들어선 방은 6피트×6피트짜리 정육면체였다.
다른 공간과 달리 쓸데없는 잡동사니가 없었다.
실용적이고, 미니멀하고, 불편했다.
거의 금욕적이라고 해도 될 만큼.
이곳은 편하려고 사는 방이 아니라 뭔가를—목표를—좇기 위해 버티는 방이었다.
몸이 주는 고통도, 안락함도,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덤덤이 좀 과하게 의미를 부여한 걸지도 모르지만 방향은 맞는 것 같았다.
멜스트롬은 거실로 돌아왔다.
다른 이들은 차분하고 꼼꼼하게 유닛을 뒤집어엎으며 쓸 만한 걸 찾고 있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물론 난장판을 만들고는 있었지만 발자국을 지우는 건 그들이 좆도 신경 쓰지 않는 결과를 피하려고 과하게 조심하는 꼴이었다.
떠날 시간이었다—더 할 일은 없었다.
덤덤은 여자의 시체를 마지막으로 한 번 내려다봤다.
그녀는 그다지 용감한 얼굴을 하지 못했다—고통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정말로 자기 아들이 어디 있는지 몰랐던 게 맞았다.
—
NCART 정류장 다섯 개, 환승 한 번, 그리고 두 정거장 더.
평소 이동 시간에 30분짜리 도보가 추가됐지만 프로그램은 이 경로가 지난 한 달 동안 범죄가 발생한 구역을 피하기에 가장 좋다고 판단했다.
기본 설정은 ‘일주일’까지만 반영한다.
그는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시간은 이른 오후였고 열차는 거의 비어 있었다.
광고의 향연이 전면에 펼쳐져 벽의 빈 공간을 죄다 덮고 열차 한가운데를 물결치듯 흘렀으며 터널 벽면을 따라 깜빡이며 스쳐 지나갔다.
알버트는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으려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직접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곁눈질로 다른 승객들을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그러는 게 오히려 더 눈에 띌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에게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앞쪽의 두 소녀는 해로워 보이지 않았다.
장난감 로봇을 갖고 노는 꼬마도 그랬다.
그다음은 공장 노동자처럼 보이는 세 명—아마도 진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세 좌석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알버트는 그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결국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는 도착했을 때의 행동 계획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가 집에 없으면?
아니, 있을 것이다—그녀는 늘 집에 있었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밖에 나가지 않았다.
‘집에 있을’ 뿐만 아니라 현관문부터 그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뭔가를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버트에게 필요한 시간은 고작 30초였다.
그가 찾는 것을 찾고 빠져나오기까지.
그러면 그는 영원히 사라질 수 있다.
그는 열차에서 내렸고 세 개의 ‘잠재적 위협’이 결국 자기 상상에서 나온 산물이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는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찾았다.
비교적 안전한 상업 지구를 통과하는 반 마일 정도의 거리였다.
설령 어떤 이유로 일부 구간이 안전하지 않더라도 그는 그냥 우회하면 된다.
그는 ‘생각 명령’으로 프로그램을 다시 불러 망막 디스플레이에 띄웠다.
젠장. 그가 가려는 곳에 빨간 점이 찍혀 있었다.
사실, 그가 자란 바로 그 아파트 건물에서 중범죄가 발생한 것처럼 보였다.
—
“생각은? 가설은?”
리암이 물었다.
신참의 시선이 거실과 각자 일하고 있는 포렌식 요원들을 훑었다.
다행히 바닥이 기울어져 있어 짙은 핏빛 웅덩이 대부분이 벽 쪽으로 모여 있었다.
덕분에 돌아다니기는 한결 쉬웠다.
TV는 꺼져 있지 않았고 벌써 세 번째로 능동 방어 메커니즘이 달린 방범문 광고를 내보내고 있었다.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람.
탁구공만 한 마이크로 드론 두 대가 다른 방들에 남은 지문 스캔을 마치고 얌전히 서류가방으로 돌아갔다.
“상처 모양 보이지?”
리암이 시트를 들추었다.
끈적하고 점성이 강한 피가 차가운 시체 위로 뚝뚝 떨어졌다.
“평행이지만 깊진 않아. 정교하지. 죽이려는 것도 아니고, 고통을 주려는 것도 아니야—그럴 거면 더 좋은 방법이 백 가지는 있어. 저건 ‘즐긴’ 거야. 맨티스 블레이드로 칩드된 자식들 짓이지. 전투용은 아니고. 적어도 이번엔.”
그는 신참이 창백한 얼굴로 손으로 입을 가리는 걸 보자 재빨리 시트를 놓았다.
“뭐 떠오르는 거 있어?”
그가 시체를 가리켰다.
“델레이니 부인에게 벌어진 일.”
신참은 서둘러 고개를 저으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해리스 자동차 수리소.”
리암이 말했다.
“경비. 비슷한 점 안 보여?”
“하지만 거긴 동네가 완전히 달랐잖아요.”
신참은 얼굴의 핏기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말문은 조금 되찾은 듯했다.
“연결돼 있다고 보세요? 델레이니 부인은 차도 없었는데요.”
“어떤 질문은 간단한 답이 없어.”
리암은 벽 아래에서 굳어가는 피를 바라봤다.
“예를 들면 저 피가 아래층 이웃한테 새어 내려갈지 같은 거.”
---
죄책감 유발 비난의 눈사태는 피할 수 없었다.
그냥 그녀를 무시하면?
들어가서 샤드만 챙기고 나와.
좋아. 그런데 어머니가 문 앞을 막고 서서 설명을 요구하면?
그는 뭔가를 말해야 한다. 아니면 뭔가를 해야 한다.
그는 대체로 그럴듯해 보이는 상점들의 창문을 지나쳤다.
수상한 기운이 있다면 긴 코트와 후드 티를 뒤집어쓴 채 골목에 숨어 있었다.
길가에 세워진 차들 안에는 썬가에 세워진 차들 안에는 틴팅된 창 너머로 누군가가 그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일 때도 있었다.
인도 한가운데를 걸어라, 얼굴 없는 군중에 섞여라, 그러면 괜찮을 거다—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쨌든 이건 전형적인 병신 같은 실수였다.
서두르면 이런 일이 생긴다.
그래서 그가 이 고위험 외출을 하고 있는 거다—‘동굴’ 접근 코드가 샤드에 저장돼 있었고 그 샤드는 수년 동안 손대지 않은 채 서랍 맨 아래에 있었다.
덱 구성을 끝낸 뒤로는 키가 필요 없었다.
자동으로 연결됐으니까.
새 덱, 새 구성. 처음엔 알버트가 분노해서 작은 짜증 발작을 한 번 부렸다.
그것으로 해결되는 게 없자 그는 진정하고 가능한 선택지를 따져봤다.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옛 유닛으로 돌아가는 것.
짧은 여행이다.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는 점점 더 화가 쌓일 것이고 언젠가 그게 벽돌더미처럼 통째로 그에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알버트는 최소한 1분만이라도 어머니가 그를 들볶지 못하게 만들 무언가—아무 말이나—해야 했다.
그는 변명 몇 가지를 떠올렸다.
대부분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잠깐 생각에 잠길 만한 말들.
그가 필요한 것을 챙기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만큼의 시간.
알버트는 평소 이용하던 NCART 정류장을 지나쳤다.
2주 전 강도가 있었고 그래서 그 역은 프로그램에서 빨간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동 경로에 한 시간 넘게 덧붙였다.
---
“사망 시각—한 시간도 안 됐어.”
리암이 여자의 머리 쪽에 손을 들었다.
손목의 다이오드가 깜빡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손가락이 초록과 빨강으로 맥동했다.
“사인—실혈로 인한 심정지. 주요 장기 손상은 없어. 피부와 조직에 난 수많은 절개만으로도 충분히 죽일 수 있었지.”
그는 눈을 뜨고 일어섰다.
“부검 후 더 알겠지만 새로울 건 별로 없을 거야.”
“얼굴은… 완전히 멀쩡하네요.”
신참이 말했다.
결국 그녀도 시트 밑을 들여다보긴 했다는 얘기였다.
“재갈도 안 물렸고요. 깨어 있었다면 비명을 질렀을 텐데요, 도움을 부르거나요. 이건… 시간이 꽤 걸렸겠어요.”
시체 옆에는 부서진 브레인데이스 화환이 놓여 있었다.
많은 게 설명됐다.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를 기습했다.
그녀가 방어할 방법은 없었다.
“대충 맞는 말이야.”
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웃들은 놈들이 떠난 다음에야 경찰에 신고했지. 시작할 때 아무 소리도 못 들은 척했고.”
“왜요?”
“보복이 두려워서겠지.”
리이 말했다.
“언젠가 자기 집 현관문이 총알 세례를 받을까 봐. 네가 눈치챘는진 모르겠는데 이 도시에서 우린 딱히 존경받는 부류가 아니거든.”
“존경이요?”
“우러러본다는 뜻.”
생각하듯 형사는 죽은 여자를 바라봤다
“NCPD는 가장 두려워하는 놈들을 죽일 수 없으니까 감옥에 집어넣지. 그런데 하필 그놈들은 거길 원해—거리 명성 쌓이거든. 이길 수가 없어.”
포렌식 요원들은 이미 장비를 챙기고 있었다.
또 하루, 또 사건 현장.
나이트 시티에서 해가 뜨고 지는 동안 벌어지는 수백 건의 살인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루에 최소 백 건의 살인이 나는 나이트 시티에서는 그들의 일도 정밀한 과학이라기보다 ‘작업 물량’에 가까웠다.
“네가 평균적인 NC 시민이라고 해봐.”
잠시 생각한 뒤 리이 말했다.
“갱이랑 맞붙겠냐? 혼자서.”
“죽기를 각오한 거라면요?”
신참이 인정했다.
“그래, 감 잡았네. 다만 이웃들 탓은 아니야.”
형사는 붉은 갈색 웅덩이 가장자리의 발자국을 가리켰다.
정비소에서 봤던 것과 같은 복장이었다.
발자국을 숨길 생각조차 안 했다.
놈들을 찾고 사건의 흐름을 맞추고 관계망을 풀어내고 범인과 피해자의 동기를 밝혀내는 것—그런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가능은 하다.
어려운 건 그걸 ‘증명’하는 일이다.
윗선도 그걸 잘 안다.
범인을 잡지 못한 채로 사건이 닫혀도 누가 씹어먹듯 갈구진 않는다.
검거율 따위는 이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은… 가끔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진짜 일을 해야 하는 사건이 있다.
배지가 죽으면 범인을 찾는 건 ‘명예’의 문제가 된다.
이건 생존 본능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갱들은 보통 배지를 쏘기 전에 결과를 진지하게 생각한다.
그게 이 조직에서 아직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갱놈도 상대의 뇌통에 납을 때려박기 전에 한 번은 더 생각한다는 것.
말하자면 생명보험 같은 거다.
신참은 벽 쪽으로 물러섰다.
구급대원 두 명이 붉은 웅덩이 옆에 들것을 내려놓았다.
시체를 들어 올리자 끈적하게 굳은 피가 바닥에서 떨어지며 베리 맛 스콥처럼 찰싹 소리를 냈다.
“그런데 우리,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죠?”
신참은 시체를 보지 않으려 했다.
“어떻게 이게 다 연결돼 있다고 아신 거예요?”
“우린 시스템에서 태그로 범죄를 분류해.”
리암이 경찰 지급 태블릿을 그녀에게 건넸다.
“‘절개 상처’, ‘얕은 절개 상처’—뭐 그런 것들. 난 그걸로 겉보기엔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을 연결하지. 원래 용도는 아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현장 도착한 경찰들은 보통 그거 입력하는 걸 귀찮아하지. 그런데 이번엔 드물게도 누군가 했더라. 계속 읽어.”
그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위로 밀어 페이지를 내렸다.
“여기 옵션이 있어… CASE CLOSED를 선택하면 이제 누구도 다시는 델레이니 부인을 누가 죽였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신참이 머뭇거렸다.
“이걸 계속 잡을지 아니면 덮을지… 우리가 결정한다는 말씀이세요?”
“맞아. 엘레나 델레이니는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어, 고인에겐 미안하지만. 그걸 선택하면 사건은 자동으로 아카이브로 가.”
리암이 말했다.
“물론 그 전에 다들 서류를 채워야지. 그건 다들 할 거고. 그러면 그걸로 끝이야.”
신참이 형사를 경계하듯 바라봤다.
“그럼 왜, 아직 그걸 선택하지 않으셨어요?”
리암은 태블릿을 집어넣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네가 왜 경찰이 됐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어?”
그가 물었다.
“선서식은 언제지?”
“며칠 뒤요.”
신참이 놀란 듯 대답했다.
“하지만 형식적인 거잖아요? 전 이미 사실상 경찰이니까요.”
리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막 문이 열리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알버트는 움직이지 못했다.
한 발도 떼지 못했다.
발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유닛—어머니의 유닛—에서 포렌식 수트를 입은 두 사람이 들것에 실린 시체를 운반해 나오고 있었다.
알버트는 얼어붙은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는 시선을 준 채로 아무 층이나 버튼 하나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회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대머리 남자가 그를 무심한 듯 흘겨봤다.
그 옆의 다른 배지는 시체 자루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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챕터 6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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